성민감리교회/주일대예배설교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려면

예청 2010. 2. 8. 10:25

본문) 롬 8;1-9
제목)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1, 인간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던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가리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불안 그 자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갈등 가운데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처럼 굳건하게 서서 강건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렇게 연약하여 갈등하고 고뇌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신앙인도 그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라 (고전16;13)”고 말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불안한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이기에 더 큰 갈등과 고민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 바울 사도는 그의 갈등과 고뇌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롬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니 자신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자신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실제 행하는 것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는 죄인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신 속에 두 개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자신 속에 선을 향하는 마음과 더불어 악을 향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상징하는 하트를 그리면 두 개의 모양이 좌우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마음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마음이 다투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마음 가운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악을 향하는 마음인 것을 알게 됩니다.
(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3)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이러한 갈등과 고민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곧 나의 갈등이요 나의 고민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써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악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어떻게 하면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바울 사도는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악을 따르려는 마음이 공존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보다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더 커서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더 행하는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럴까요?
왜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임해야 할까요?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과 악의 승리를 해결하려면 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첫째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 이 말씀을 보면 두 개의 법이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고 또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을 <공동번역성서>로 보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이 있으면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와 사망의 법’이란 죄를 지으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화분에 심겨진 꽃나무’와 ‘꽃꽂이 꽃’을 생각해 보세요
‘꽃꽂이 꽃’은 생명이 없는 꽃입니다.
화려하게 보이고 향기를 발하고 있지만 며칠이 지나면 말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에서 잘렸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분에 심겨진 꽃’은 잘 가꾸어주면 계속 자랍니다.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꽃꽂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사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화분에 심겨진 꽃나무’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선과 악이 갈등하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악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하’입니다.
‘루아하’는 숨결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호흡이 멈춰서 죽어가는 환자에게 인공호흡으로 숨결을 불어넣으면 호흡이 살아납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른 죄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면 살아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입니다.
선과 악의 갈등 속에 고뇌하고,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는 나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게 되고 의롭게 살게 되고 선을 행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성령이 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나의 연약한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통하여 생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5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1) 생각은 방향타와 같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방향타에 따라 진행하듯이 우리의 행위는 생각의 방향타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어떤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습니다.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구분합니다.
나의 자아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무의식은 마치 망망대해와 같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자아의식은 바다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욱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은 의식보다 무의식에 더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2) 왜 바울의 고백처럼 사람들은 그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까?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까?
그것은 의식의 세계보다 무의식의 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신앙적이지만 무의식은 아직 신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영혼의 공간입니다.
영혼까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무의식에 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는 신앙적이기 원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무의식의 영향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에 성령이 임할 때에 심령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만 신앙의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까지 신앙의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온전하게 신앙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를 본문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생각을 품게 되면 생명과 평안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을 행하게 됩니다.
(7-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신앙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거듭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령에 붙잡힐 때에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도 ‘성령과 생각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요14;26절)의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도서관에 수많은 책이 쌓여있는 것처럼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필요한 책을 요구하면 사서가 골라주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수많은 생각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골라주십니다.

그 때에 주어지는 평안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갈등을 극복하고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성령의 생각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성령에 붙잡히고 무의식이 성령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특히 영혼의 공간인 무의식의 세계가 성령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갈등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4) 성령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생각이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혼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 성령 충만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마음에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1)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분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연약함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악에게 패배하는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을 아는 성도는 성령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할 때에 성령은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어 우리를 도우십니다.
곧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살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의 갈등과 고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성민감리교회 > 주일대예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의 축복  (0) 2010.02.08